기억, 망상, 그리고 종이 위의 글씨
기억은 흔들리고, 기록은 남는다
“그때 열심히 했다”는 문장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됐다. 오늘 내가 저장한 한 장의 PDF는 2017년의 시간을 ‘설명’이 아니라 ‘사실’로 고정했다.
1) 기억과 망상은 생각보다 가까운 이웃이다
기억은 종종 예의 없이 사라진다. 어제까지 선명하던 장면이 오늘은 흐려지고, 누군가의 “기억 안 난다” 한 마디가 내 시간을 가볍게 만든다. 그때부터 사람은 마음속에서 작은 재판을 연다. 그 시간이 실제였는가, 내가 만들어낸 것이었는가.
그래서 나는 “기억”과 “망상”을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본다. 기억이 나를 설득하지 못하는 순간, 필요한 건 더 강한 주장(말)이 아니라 외부에 남아있는 근거(물건)다.
2) 종이 위의 글씨는 ‘체온’까지 남긴다
키보드로 쓴 문장은 수정이 쉽다. 그래서 흔들리기도 쉽다. 반면 손글씨는 수정이 어렵다. 틀리면 지우기보다, 틀린 흔적 위에 겹쳐 쓴다. 그 과정 자체가 기록이 된다. 오래된 노트의 삐뚤한 필체는 내용뿐 아니라 그때의 속도와 체온까지 남긴다.
기록은 정보를 보관하는 행위가 아니라, 시간을 고정하는 방식이다.
3) 한자(漢字)의 압축처럼, 기록은 의미를 ‘새긴다’
한자는 압축의 언어다. 한 글자에 의미가 겹겹이 들어간다. ‘記(기록할 기)’는 단순히 적는 것이 아니라 새긴다는 감각에 가깝다. 그래서 기록은 정보가 아니라 의지가 된다. 내가 무엇을 믿었고, 무엇을 남기려 했는지의 흔적이다.
4) 한 장의 PDF가 만든 차이
오늘 내가 한 일은 간단했다. 예건 시절 블로그 글을 PDF로 저장했다. 하지만 그 순간부터 설명이 달라졌다. “그때쯤”이라는 표현이 필요 없어졌다. 날짜가 찍히면 말이 정돈된다. 2017년 3월 20일. 숫자 한 줄이 시간을 고정하고, 고정된 시간은 나를 덜 흔들리게 한다.
5) 오늘부터의 최소 규칙
- 주장에는 근거를 붙인다. 링크·날짜·PDF·캡처 중 하나면 충분하다.
- 추정은 추정으로 분리한다. 기억과 근거를 섞으면 글 전체가 약해진다.
- 기록은 먼저 나를 위해 한다. 누가 알아주기 전에, 내가 나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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